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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 사건

    * 상위 항목 : [대한민국/정치]], 대한민국/역사, 흑역사가 된 것들/정치와 행정, 사건/사고 관련 정보, 제4공화국
    
    * 10.26 사건 이후 현장 검증. 사진은 현장 검증에서 김재규가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모습이다. 왼쪽에 묶여 있는 사람은 김계원 전 비서실장.
    
    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1/10/24/41340816.1.jpg
    
    *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가수 심수봉(왼쪽 모자 눌러쓴 이). 오른쪽은 함께 증인으로 출두한 신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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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26과 관련된 인물들.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재규, 오른쪽 끝이 차지철이다. 사진은 10.26 사건 4년 전 사방공사 시찰 때의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좌우 두 인물의 위치가 박정희 대통령의 왼팔과 오른팔의 위치와 결부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 사진 출처 : 뉴스뱅크 
    
    >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YH 여공 사태 당시 연설(10.26 사태가 일어나기 약 두 달 전) -
    
    
    > [10.26 사건]은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우발적이었고, 준비가 엉성했다고 보기에는 치밀했다. -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 -
    
    
    >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 입니다." - 김대중 당시 민민연합 공동의장, 10.26 직후 인터뷰 당시 -
    
    
    >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사형장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
    
    
    > "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박정희)가 불행해질 것이다." - 이종찬 전 육군 참모총장, 당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당시 -
    
    목차
    Contents
    
        1 개요
        2 사건의 전말
        3 김재규의 오판, 그리고 파멸
        4 계획적 거사인가? 우발적 살해인가?
        5 결과와 파장
        6 사건 관련자 명단
            6.1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6.2 사망자
            6.3 생존자
            6.4 사건 처리자들
        7 관련 미디어
    
    개요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 크게 상관없는 얘기겠지만, 이 안가는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이다.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경제적으로 70년대 후반 누적된 성장 드라이브 정책의 후유증과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1인 장기집권에 의한 강압통치,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불화 등 정치 및 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wiki:"부마민주항쟁"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이 부마민주항쟁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을 [발터 PPK] 권총으로 살해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우선 박정희가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이 내세우던 강경노선 쪽으로 손을 들어 주었고, 이에 기가 산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임무를 넘어서서 중앙정보부의 영역까지 손을 대려고 하는 월권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대통령 측근들이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이 국회의원을 해 봐서 정치를 잘 안다." 라고 오히려 두둔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입지가 좁아져 거세 위기에 놓인 김재규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음모라는 설도 있으며, 김재규가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 또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3가지 설명은 모두 [김재규] 개인의 의사에 크게 기대거나, 음모론에 그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당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의 개입 내지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형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보였다. 즉, 부마민주항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될 경우, 군부대를 동원하여 강경진압에 의한 유혈사태가 터질 확률이 높았다. 이런 사실들을 보았을 때,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김재규라는 방아쇠로 나타났을 확률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 김재규가 민주화 운동 자체를 지지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민주화 세력에 대해 온건한 대응을 검토하는 수준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부마민주항쟁 항목 참조.
    
    아무튼 이 [10.26 사건]은 유신체제가 붕괴되는 교두보였으며, 한편으로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사건의 전말
    
    1979년 10월 26일. 당일 대통령 박정희는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후, 오후 2시 반경 청와대로 복귀하였다. 이 당진 송신소 건물은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는 건물인 바, 부장인 김재규가 당일 아침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할 의사를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로 밝혔지만,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중정부장까지 자리를 비우면 어쩔 것이오? 김 부장은 그냥 서울이나 잘 지켜 주시오." 라면서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이날 김재규가 빡돌은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4시 경, 박정희로부터 대행사, 즉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경호실장 등이 참석하는 연회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통해 중정 안가측에 대행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참고로 대통령과 시중드는 여성 단 둘이서 하는 연회는 소행사 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경호실로부터 대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주방에 연회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후 대행사를 도울 여성을 섭외했는데, 이 날 섭외된 여성은 당시 모델 겸 배우[* 당시에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여대생으로 묘사된다.]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 이었다.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정 집무실에서 차지철로부터 이날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가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후, 안가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누자"며 그를 초대했고, 중정 제 2차장보(국내담당) 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로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김재규의 살의(殺意)는 이때부터 발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오후 5시 20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먼저 안가에 도착했다. 김재규는 김계원과 안가 앞마당에서 부마항쟁 때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민심을 얘기하며 "부마항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이다" 라고 강하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차지철이 부마항쟁을 신민당이 개입한 일부 불온세력의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라 호도했기 때문이라고 그를 심하게 비난하며 "차지철 이 자식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 라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나도 중정부장을 해봐서 알지만 김부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내일 민정수석의 대통령 보고 때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다" 면서 김재규를 달랬다.
    
    오후 6시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맞이하여 대통령을 나동의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수행차 안가로 온 청와대 경호실 직원 중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 평소 대통령의 관용차량은 이타관(박정희가 사단장 일때 운전병으로 인연을 맺었다)이 몰았지만 대, 소행사 때는 비공식 행사용 차량인 [도요타] 크라운 슈퍼살롱을 운행했기 때문에 이날은 김용태가 슈퍼살롱 운전을 맡았다.] 경호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은 나동의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 경호처장과 안재송 부처장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따로 저녁식사를 했다. 당시 중정 안가에서의 행사 시, 대통령 경호는 안가 경비원들에게 맡기고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드라마 [wiki:"제4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 에서 경호실 내부 회의 중에 "청와대 경호원들의 영향이 안가에선 무력화 된다. 조치가 필요하다" 라는 건의가 있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 부장 정도야 내 파워로 꽉 누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장면이 있었다. 실제로 경호실 내에서 이런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 듯 싶은데 어쨌든 경호원들이 거의 무장해제 당하는 안가 내부의 특성이 대통령 암살이란 사건을 초래한 한 요인일 수도 있겠다.]
    
    이 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이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연회 당시 술 이외의 만찬 메뉴는 꿀에 재운 인삼과 송이버섯 구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도라지나물, 전, 생채, 편육 등으로 의외로 평범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해당 사건을 다룬 매체에서는 비쥬얼이나 의미 부여를 위해서 일부러 만찬상을 호화롭게 묘사하는 편이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몰아내고 정운갑을 총재 대행으로 올리려던 정보부의 공작) 어떻게 되었는가" 라고 묻자 김재규는 "당직에서 사표 내겠다던 의원들이 강경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다 틀렸다" 라고 답했다. 이에 박정희는 부마항쟁과 김영삼 제명건을 들먹이며 "김영삼을 구속시켜야 했다" 라고 강한 어조로 몰아붙였고 김재규는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는 건 그를 [정준하|두번 죽이는] 셈이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 라면서 진언하자 짜증이 난 박정희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 놈들 비리만 쥐고 있으면 다가 아니다" 라며 김재규를 심하게 질책했다. 게다가 옆에서 차지철은 "야당 놈들 중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다.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한다" 며 맞장구를 치고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며 비아냥 거리면서 김재규를 계속 코너로 몰고 갔다. 이런 살벌한 상황을 무마시키려 김계원 비서실장이 김재규에게 [위스키]로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하고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등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무소용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저녁 6시 30분 쯤 신재순과 심수봉이 연회장에 들어오면서 조금 누그러졌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식사 중이던 정승화 총장에게 가서 "갑자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다. 김 차장보가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얘기좀 나누고 계시라. 끝나는 대로 곧 오겠다." 라며 해명을 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던 의전과장 박선호(김재규가 체육교사를 하던 시절 김재규의 제자)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김재규의 6사단장 재임 당시 전속부관)을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어 아래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 김재규: (호주머니의 권총을 보이며)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오늘 저녁 내가(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지금 본관에 육군 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 박선호: 부장님, 각하도 포함됩니까?
    * 김재규: 그래.
    * 박선호: 오늘은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와 있고 날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날을 고르시지요.
    * 김재규: 안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 똑똑한 녀석 세 놈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워 버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 박선호: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장님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 김재규: 30분은 너무 길다.
    * 박선호: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 행동하시면 안됩니다.
    * 김재규: 알았다.
    
    그리고 김재규는 박흥주를 향해 "자유 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고는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고,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예비역 해병 하사 출신. 평소 박선호의 신임이 깊었다)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을 암살조에 합류시켰다(참고로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가로 배치되었으며, 그는 그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다.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 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정인형은 앞서 말했듯이, 해병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으니...
    
    저녁 7시 38분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재규는, 7시 40분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발터 PPK]를 꺼내어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이 새끼, 넌 너무 건방져!!" 라고 외치며 제1발을 발사했고,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시켰다. 김재규의 당시 발언엔 두 가지 설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소수설이었으나 지금은 이것이 정설이다. 흔히 알려진 다수설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으로, 김재규가 사격 직전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 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라면서 발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때 논란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과 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결국 신재순의 버러지 발언을 포함한 다수설은 합동 수사본부 측의 강권으로 거짓 증언한 것임이 최근에 밝혀졌다.중앙일보 기사
    
    갑자기 저격당한 차지철은 총탄에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 라고 외쳤고, 박정희가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 라며 일갈하자, 김재규는 3~4초쯤 후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로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제2발을 발사했다. 뒤이어 당황하는 차지철에게 김재규는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로 피신해 버렸다. 그리고 우측 흉부 관통상을 입은 박정희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정좌하고 있다가 신재순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라며 부축하려 하자 박정희는 "난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며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김재규의 제1발을 신호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소지한 권총과 소총으로 주방에서 식사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안가 요리사 이정오가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이 어깨에 총을 맞는 등 안가 직원 몇명도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은 허벅지 관통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부상을 입고 누워있어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랐다. 게다가 청와대 경호원들은 대개 소행사 때마다 안가의 중정 직원들과 마주치다보니 친분이 두터웠고 막역한 친구 사이인 경우도 많았던 바, 김태원으로선 친하게 지내던 경호원에게 쉽사리 총구를 들이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상범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같은 시각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 안주를 먹으며 AFKN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려 하자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리자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으나,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거꾸러뜨린 김재규는 [wiki:"확인사살"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후두부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김재규의 오판, 그리고 파멸
    
    거사를 마친 김재규는 복도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김계원에게 "나는 한다면 한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해주시오" 라고 언질한 후,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던 정승화 총장을 차에 태워 김정섭 차장보와 같이 안가를 빠져 나오면서 "각하가 돌아가셨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정승화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안정을 찾고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갈지 육본으로 갈지 우왕좌왕 하던 김재규에게 병력 동원 차원에서 [wiki:"용산구" 용산]의 육군본부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에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이날 김재규의 판단은 아직도 김재규 최대의 실책이었다고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오죽하면 김진명의 소설 '한반도(10.26으로 개작)'가 이걸 떡밥으로 썼겠는가. 그러나 떡밥은 떡밥일 뿐이라는 것이 중론인 듯. 자신의 영향권인 중정으로 가서 그곳에서 훗날을 도모하던가 했어야지(더구나 조작과 은폐의 달인 중앙정보부가 아니었던가?), 당시 군부 내에서의 평가가 높지 못했던 김재규가 육본으로 간 것은 '나 잡아잡수' 하고 그대로 호랑이굴에 뛰어든 셈이었다. 이 때문에 김재규가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설이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이 당시 김재규가 매우 당황하고 행동을 서두른 증거 중의 하나로, 육본으로 차를 타고 오면서 그는 아예 신발도 신고 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박흥주의 신발을 빌려 신었고, 박흥주는 차량 운전수의 신발을 가져다 신었다.
    
    김재규 일행이 육본에 도착했을 당시 에피소드 중 하나. 정승화 참모총장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육군 본부의 초병은 "총장님? 어느 대학 총장님이십니까?" 하며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당시 정승화는 옷차림이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이었고, 타고 온 차도 자신의 관용차량이 아니라 김재규의 차였다. 이후 다른 인원들이 정승화의 신분을 알아채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대통령 살해 사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어서 10.26을 다루는 매체에선 이 에피소드 또한 넣는 편. 이 에피소드는 정승화의 회고록에도 나오는 실제 이야기이다.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숨긴 채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이다. 이 사실을 최소 48시간 동안 보안에 붙이고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난다" 라고 길길이 뛰었지만, 법무장관 김치열이 "이런 중대한 사태를 이유없이 48시간이나 보안으로 숨길 수 없다. 미국에도 이 사실은 알려야 한다" 며 반박했고,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고향 선배인 부총리 신현확이 "밑도 끝도 없이 계엄령이 말이 되느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말을 밝히라"며 버럭하는 통에 김재규는 깨갱한 채 [버로우] 해버렸다. 박정희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던 강직한 성격의 신현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현확이 육본에 도착하기 전, 다른 장관들은 김재규의 기세에 밀려 전전긍긍 하고 있던 상태였다.
    
    한편,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김계원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고 주치의인 병원장 김병수 [공군] [준장]이 시체를 검안하는 과정에서 하복부의 피부병 자국에 의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보안사 참모장인 우국일 준장과의 통화 시에 옆에서 권총으로 위협하고 있던 안가 경비원 몰래 "코드 원이 돌아가셨다" 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에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가장 먼저 포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를 병원에 안치하고 육본으로 온 김계원에 의해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란 사실이 들통났고, 결국 김재규는 전두환의 보안사 수사요원에 의해 체포당하며 거사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박선호와 박흥주를 위시한 암살조도 그 다음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전직 보안사령관 으로서의 전관예우로 다들 부장님 부장님 하며 쩔쩔맸다고 한다. 김재규를 체포하여 호송해온 수사관 신동기도 한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 에서 6개월 과정 정보교육을 마칠 때 성적 우수자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고,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이 들었는 지라, 신동기로서는 김재규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박정희 시해가 김재규의 단독범행 임이 밝혀지면서 안면몰수 하고 강력하게 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신동기는 김재규에 대해 바로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심문에 돌입했다. 심문 도중 김재규는 수사관의 주먹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는데, 위 현장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그러므로 당시 김재규의 수사를 담당했던 이학봉이 "김재규를 고문하지 않았다" 라고 한 증언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재규의 탄원서에 의하면 군용 전화기 전선을 발가락에 묶어 전화기를 돌리는 전기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 때 지병인 [간경변]으로 인해 간기능이 거의 마비된 김재규는 고문으로 인한 내출혈이 멎지 않으며 초죽음이 되었고, 당황한 보안사 수사관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이 대통령 주치의이던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 [준장]을 불러 김재규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다.
    계획적 거사인가? 우발적 살해인가?
    
    전후 정황을 살펴볼 때, 적어도 김재규가 특정 인물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은 분명하다. 자신이 권총을 준비하고, 수행원들에게도 관련 지시를 내려둔 점, 선배이기도 한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사건 직후 "난 한다면 한다"고 말했던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본래 김재규의 살해 계획은 박정희가 아닌 차지철만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건 직전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형님, 오늘 이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라고 말했던 바 있다. 여기서 '이 자식'은 차지철을 지칭한 것. 그러다가 사건 당일 박정희가 지나칠 정도로 차지철을 두둔하고, 김재규 자신을 질책하자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박정희에게 까지 총탄을 날린 것.
    
    정리하자면 김재규에게는 차지철을 죽일 계획만 있었을 뿐, 박정희까지 겨냥한 '국가원수 암살'과 이후의 '신정부 수립'은 당초 계획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차지철을 죽인 것은 계획적이었지만, 박정희를 죽인 것은 우발적이었던 것. 이는 박정희, 차지철의 피살 이후 김재규가 저질렀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한 행동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배경 요인이 된다.
    
    
    결과와 파장
    
    이 사건의 전말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 보고에 의해 10월 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주모자인 김재규, 그리고 박선호와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안가 경비원으로 이날 피해자들에게 [wiki:"아말라이트 AR-15" M16] 소총으로 확인사살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 전원이 사형을 언도받고,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가 떨어졌으나, 그 이전 총살된 박흥주와 감형된 김계원(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을 제외한 5명은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재규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은 철옹성 같던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고, 그는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최규하를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또한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라는 혐의를 씌워 체포해 버리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에 꼭지점에 서는 데 성공, 또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전두환이 12.12 부터 5.18을 거쳐 대통령에 오르기까지의 약 9개월간의 시간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 라고 일컫는다.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무려 2년 동안이나 가수 활동을 정지당해야 했고, 신재순 또한 더 이상 한국에서는 살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1993년 철거되어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여담으로 하순봉[* 1970년 중반 [뉴스데스크] 앵커 경력도 있던 [문화방송|MBC] 기자 출신으로, [한나라당] 의원을 역임했다.] 경남일보 회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는 1981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치고 핵무기를 공개하면서 대통령 퇴임을 선언하겠다고 밝혔다 한다. 만약 10.26의 발생 없이 박정희 대통령이 그 이후에도 계속 생존했더라면, 1981년에 퇴임했을 수도, 그렇지 않고 계속 집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공교롭게도 딱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었다.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저격 사건이 같은 날 일어난 점 때문에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런 저런 말이 많은 편이다.
    사건 관련자 명단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 박정희 - 대통령, 피해자.
    *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피해자.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가해자.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실 경호처장, 피해자.
    * 안재송 - 대통령 경호실 경호부처장, 피해자.
    * 김용태 - 대통령 경호실 특수차량운행계장, 피해자
    * 김용섭 -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피해자.
    * 박상범 - 대통령 경호실 경호계장, 피해자.
    * 박선호 -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가해자.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육군] [대령]), 가해자.
    * 이기주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조장, 가해자.
    * 유성옥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운전기사, 가해자.
    * 김태원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가해자.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원래 배우로서 촉망받던 모델이었으나 이 사건의 여파 때문에 더 이상 연예인을 할 수 없었고 결국 미국으로 이민갔다.
    
    사망자
    
    * 박정희 -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흉부 관통상과 후두부 총상으로 사망.
    *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손목 관통상과 복부 총상을 입은 후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실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저격에 목 관통상으로 사망.
    * 안재송 - 대통령 경호실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저격에 흉부 총상으로 사망.
    * 김용섭 -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 김용태 - 대통령 경호실 특수차량운행계장,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생존자
    
    * 김계원 
    * 박상범 
    * 심수봉 
    * 신재순 
    
    사건 처리자들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박정희 사망 후 계엄 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 전두환 -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관련 미디어
    
    * [wiki:"제4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이대근 역)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박정희를 시해하기 전 집무실에서 빈 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일본어로 '고로시마스(殺します, 죽여 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고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4공의 해당 장면에서는 자막은 '고로시마스'라고 뜨는데 김재규 역을 맡은 박근형의 대사는 "고로스(殺す, 죽인다)"였다.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근데 이거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 박정희 저격후 체포되고 난 다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후 등장이 없다가, 5.18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되실뻔 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 코리아게이트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배우로 유명했던 故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 자체는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화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 그때 그 사람들
    김재규와 박정희 시해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백윤식이 김재규 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능글맞은 이미지가 김재규 역에 잘 녹아들었다.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편에 속하는 수작이다. 다만 조롱과 희화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을 묘사 할 때 고증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박정희와 관련자를 풍자하는부분에서 역사사실과 다른 경우도 있다. 자세한건 항목을 참고바란다. 
    
    * [wiki:"제5공화국(드라마)" 제5공화국]
    이 작품도 또한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가 포스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김재규 역을 맡은 김형일이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근데 목소리가 너무 중후하다(...)~~ 또한 어느 국밥집에서 박정희의 유고를 다룬 뉴스가 보도되자 "잘 죽었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과 "각하께서는 나라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사람이 싸움이 붙는 장면 또한 백미. 별것 아닌 장면 같지만 이는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참고로 항목 맨 위의 10.26 사건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평 가운데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이 한 말을 이 드라마에서는 이학봉이 하는 것으로 나온다.
    
    * 그 외 제3공화국(MBC)와 삼김시대(SBS)에선 [김동현](코리아게이트에선 장태완)이 김재규 역을 맡았고, 다큐멘터리 극장 등의 KBS 작품에서는 백찬기가 연기한 바 있다.
    
    * 10.26 사태를 다룬 소설로 김진명의 '한반도'가 있다. 10.26 사태의 CIA 개입설을 다룬 이 소설은 최근 1026으로 개작되어 재출간되었다.
    
    * 송강호 주연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도 나온다. 다만 이 작품은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예로 경호실장은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이후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바뀌었으나 여기서는 차지철이 모티브인 인물이 그냥 5.16 이후 그대로 경호실장이다. 애당초 풍자 영화에 가까우니 역사적 고증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 웹툰 제 0시 : 대통령을 죽여라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다가 뜬금없이 다른 전개로 흘러간다. 26년보다 자극적인 소재이기도 하다보니 댓글 상황은 개판. 게다가 원래 사건과는 다르게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전 중앙정보부장을 암살했다는 식으로 더 저평가를 내리려고 작가가 노력하는 바람에 은유라고 보기에 너무 직설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되어 버렸다.
    
    * 윗동네에서는 당연히 왜곡돼서 다루는데 남한출신의 고위층 월북자의 전기를 다룬 민족과 운명 세번째 시리즈 홍영자편에서 그려지고 있다. 다른 월북자와 달리 홍영자는 가상인물. 여기서는 호화판 연회에 기생들을 데리고 니나노를 벌이던 박정희가 김재규의 일갈인 "야. 박정희"라는 말과 함께 총에 맞아 사망한다. 다만 몇부분의 대사는 위에 말한 다수설을 따랐다.
    
    *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그린 미국의 불쏘시개 소설 파문(툼스톤의 비밀, 파문, 10.26과 기생 이손지등등의 여러 버전이 있다)에서는 말 그대로 마약을 동원한 환락파티 끝에 김재규가 몇달전부터 준비한 총과 기생들의 독침에 의해서 벌어진다. 박정희는 원래대로 총, 차지철은 기생과 검열삭제하다가 독침에 찔려죽는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미국에서 계획하였고 이미 기생 대장 이손지와 짠 갑툭튀한 전두환이 그걸 낼름했다는 이야기. 소설 마지막에는 전두환을 그렇게 처리할 준비를 하지만 전두환은 이미 눈치챘다는 걸 암시한다. 당연히 내용이 내용인지라 8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출판후 한국에서 일월서각을 통해 번역판이 나왔을때 사장부터 여직원까지 모두 보안사에 끌려갔다. 그래서 80년대 해적판에서는 하나같이 파르크 대통령, 큐우 부장, 츙크(혹은 이중 장군) 장군등으로 표기되었다.